• : re

    「아니에요. 당신이 용서하지 않기로 다짐한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행실이잖아요? 뭘 해도 결과가 같다면, 뭘 해도 잃은 것이 돌아오지 않는다면, 하다못해 하나라도 더 많은  『좋은 것』을 하고 죽어야죠.」

    볼썽사납게 흐느꼈다. 누군가의 엄격한 질책이 몹시 정확하여, 내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졌다.
    *
    그 사람은 그건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라 말했다.
    만인에게 떳떳한 당신만의 빛이라고 했다.
    얼마나 큰 죄를 짊어져도, 선한 마음을 품어 가며 이를 버리지 않았다면, 당신의 속죄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했다.
    ……그 사람은 막막한 슬픔을 숨기며, 본인이 애타게 바라던 것을 포기하듯이 말했다.

    ― 월희 -A piece of blue glass moon-

  • : re

    모든 것이 경계 안쪽에서 숨죽이고 있었다. 숨을 참으며 다음 안개를 기다리고 있었다. 이렇게 짙게 안개가 낀 새벽, 이 도시의 유령들은 무엇을 할까. 숨죽여 기다렸던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걸어나와 산책을 할까. 목소리까지 하얗게 표백해주는 저 물의 입자들 틈으로,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인사를 나눌까. 말없이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기만 할까.

    ― 흰

  • : re

    숲 길 너머는 그들의 영역이고, 이곳 늪은 우리의 영역이다. 우리는 혼탁한 수면 아래, 부유하는 조류들과 썩어가는 덤불 사이, 축축한 진흙 밑으로 실 끈 같은 긴 팔을 뻗어 늪을 감각한다. 땅을 통해 전해지는 소리와 진동, 공기 중에 퍼져나가는 냄새들이 우리의 감각 세계를 구성한다. 우리는 고여 있는 액체 아래에서, 수많은 생물체의 집어삼키며 죽음을 삶으로, 삶을 죽음으로 되돌린다.

    ―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

  • : re

    온몸이 모래와 소금기로 뻣뻣해진 데다 냄새도 났다. 맨살이 붙은 곳이 고온이 되어 탈 것만 같다. 행복해서 터질 것 같다. 제발 사랑과 분노를 모멸과 그리움을 한 곳에 두지 말아줘.

    ― 아오노 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

  • : re

    유리, 마침내 깨달았어.
    뭘?
    왜 우리만이 이 세계에 남겨졌는지를.
    가르쳐 줘.
    너와 난 처음부터 잃어버린 아이였어. 하지만, 세계의 아이들 대부분은 우리랑 똑같아. 그러니까, 단 한 번이라도 좋았어. 누군가의 '사랑한다'는 말이 우리에겐 필요했던 거야.

    ― 돌아가는 펭귄 드럼